2019년도 제 63차 대한직업환경의학회 가을학술대회

2019년 11월 7일 (목) ~ 9일(토) 대구엑스코(EXCO)

근로시간 개편안에 대한 대한직업환경의학회의 입장

근로시간 개편안에 대한 대한직업환경의학회의 입장

 

정부가 주 52시간으로 제한됐던 근로시간을 일이 많을 때는 주당 최대 69시간까지 일을 할 수 있도록 근로시간 개편방안을 발표했다. 현재는 연장근로를 1주일 단위로만 연장할 수 있어, 주 40시간에 연장근로 12시간을 합쳐 주 52시간제가 운영되고 있다. 정부 개편 안은 연장 근로시간의 정산을 노사합의에 의해 1주 이외에 월간, 분기, 반기, 연 단위 중에서 선택할 수 있게 하며, 단위기간에 비례해 연장근로의 총량을 분기는 90%, 반기는 80%, 연간은 70%로 줄이겠다는 것이다. 즉 연장근로의 총량은 월간 52시간, 분기 140시간, 반기 250시간, 연간 440시간이다. 1주일간 근로시간 상한선은 64시간을 적용하거나 또는 근무일간 11시간 휴식 보장을 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근무일간 11시간 휴식을 보장하였을 때 4시간마다 30분 휴게시간 및 1주 1일 유급휴가를 고려했을 때 1주 최대 근로시간은 69시간이다.

 

실제 상황들을 고려해보면 주간 69시간 근무의 경우 아침 9시부터 근무를 시작한다면 밤 10시까지 6일을 연속으로 근무하게 된다. 출퇴근 시간을 고려한다면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은 부족하게 된다. 주간 64시간 근무의 경우 연간 단위로 했을 경우 최장 18주, 반기 단위로 했을 경우 최장 20주까지 상한선을 꽉 채워서 일할 수도 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주간 최대 60시간까지 재검토 지시를 내렸지만, 특정 시기에 장시간 근로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는 여전하다. 이러한 결정은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노동강도가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안전하고 건강한 근로환경을 노동기본권으로 제시한 사항을 지키기 위해 노동시간을 축소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인데, 우리나라는 거꾸로 가는 정책을 발표한 것이다.

 

정부는 근로시간 개편의 필요성 및 내용을 보면 여러 모로 의문이 든다. 첫 번째로 왜 ‘글로벌 스탠다드’에 역행하면서까지 근로시간을 늘려야 하는가이다. 하지만 정부가 예를 들어놓은 프랑스의 경우 주당 근로시간은 35시간이고, 연장도 연간 220시간으로 한국의 440시간 안에 비해 훨씬 적다. 한국은 오랫동안 글로벌 스탠다드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초장시간 노동 사회의 오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개편안으로 전체적인 노동시간을 증가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두 번째로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자며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를 도입해서 일생활의 균형을 이루겠다는 구상의 비현실성이다. 법정 휴가도 다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 장기휴가를 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이번 개편안으로 장시간 노동이 일상화되면 근로시간을 예측하기 어렵고, 여가 활동이나 자녀 돌봄 등 일상적인 일-삶 균형을 유지하기는 훨씬 더 어려워진다. 세 번째로 연장근로의 정산을 노사합의로 하겠다고 하는데, 노조 조직률이 14% 남짓에 불과한 한국에서 노사합의가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대부분의 중소규모 사업장들의 경우 노사합의는 실제로는 사측의 일방적인 요구로 귀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건강문제와 관련해서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방안은 뇌심혈관질환 업무상질병 판정기준에 따른 뇌심혈관질환 산업재해를 대폭적으로 증가시킬 것으로 예상한다. 현행 뇌심혈관질환 업무상질병 판정기준은 ①돌발적 사건 또는 급격한 업무환경 변화, ②단시간 동안 업무상 부담, ③만성적인 과중한 업무라는 세 가지 기준을 따른다.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방안이 적용된다면 세 가지 기준에 따른 뇌심혈관질환 산업재해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돌발적 사건 또는 급격한 업무환경 변화와 관련하여 현재 개편방안을 적용했을 때 수면을 취하지 못한 상태로 장시간 연속적으로 근무하는 경우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단시간 동안 업무상 부담 관련하여 발병 전 1주일 이내 업무의 양이나 시간이 이전 12주간 1주 평균보다 30퍼센트 이상 증가하는 등의 경우 인정하고 있는데 근로시간의 유연성이 극대화되는 현재의 개편안을 적용하는 경우 이런 상황은 폭발적으로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만성적인 과중한 업무의 경우 업무시간 기준으로 발병 전 12주 동안 1주 평균 60시간을 초과할 경우에는 관련성이 강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주당 60시간 근무를 최대 20주 이상 연속으로 할 수 있는 현재 개편안의 경우 이런 상황들을 늘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발병 전 12주 동안 1주 평균 업무시간이 52시간을 초과하는 경우이면서 교대제 업무, 유해한 작업환경에 노출되는 업무, 육체적 강도가 높은 업무, 정신적 긴장이 큰 업무 등의 업무부담 가중요인이 있는 경우에도 관련성이 강하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연장근로 단위를 주가 아닌 월, 분기, 반기, 연으로 바꾸게 되면 이런 경우는 일상적으로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야간근무의 경우 업무시간에 30%를 가산하기 때문에 야간근무까지 하는 경우에는 근로시간 개편방안에 의해 뇌심혈관질환 산업재해 발생 위험이 더 높아질 것이다.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방안 발표 내용 중 ‘야간근로 건강보호 강화’라는 내용이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야간작업 건강보호 가이드라인을 제작해서 보급하고, 소규모 사업장 특수건강진단 비용지원을 확대하며, 야간작업 등 업무상질병 위험요인까지 위험성평가에 포함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방안들로는 야간근로로 인한 건강문제 악화를 막을 수 없다. 장시간 노동과 야간노동이라는 위험요인을 늘리도록 해놓고 그로 인한 위험과 건강영향의 평가를 지원한다고 뇌심혈관질환이 예방될 수는 없다.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은 뇌심혈관질환 이외에 노동자들의 다른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장시간 노동의 경우 우울 및 불안 등의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며, 노동자의 집중력 저하 등으로 안전사고의 위험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야간노동과 결합되는 경우 암을 유발하는 등 다양한 건강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은 잘 알려진 학술적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대한직업환경의학회는 수많은 연구와 역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장시간 노동과 불필요한 야간 노동을 줄이는 방향으로 정책을 제안해왔다. 정부의 장시간 노동을 증가시키는 근로시간 개편방안은 노동자들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 자명하므로 대한직업환경의학회는 이에 반대한다.

 

정부는 제도의 지향점이 ‘선택권’ ‘건강권’ ‘휴식권’의 보편적 보장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사업주가 원하는 시기에 장시간 일을 하고, 역시 사업주가 원하는 시기에 쉬게 되어 노동자의 노동시간과 휴식 시간 결정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 특정시기에 급격한 노동시간 증가 및 환경의 변화를 초래하여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마침 윤석열 대통령의 지시로 재검토가 이루어진다고 하니 정부는 노동자들의 휴식과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있도록 저임금 장시간 노동구조의 해소 방안, 과로사 및 업무상질병 예방 방안 등을 근거에 기반한 정책으로 제시하기 바란다.